[야수의 딸]
“멱따는 소리.”
외관
무심했던 아버지도 야달이 눈물을 흘릴 때만큼은 부드럽게 뺨을 쓸어 주셨다. 그래서 야달은 작은 일에도 우는 체하고는 했다. 그것이 언제적 일인지 모르겠다.
이제 야달의 뺨은 메말라 핏기가 돌지 않는다. 그보다도 죽은 듯이 거무죽죽하고 칙칙하다. 야속한 세월은 매년 젊음의 특권을 하나씩 앗아가서, 지금에 이르러 그의 눈동자는 빛을 잃고 초라하다. 그 말라붙은 암적색이 달갑지 않아서인지 그는 오래간 거울을 보지 않고 지냈다. 덕분에 살갗은 거칠고 모발은 윤기를 잃은 채 늘 엉켜 있다.
몇몇 경솔한 사람들은 그의 앙상한 거구를 볼품없다 말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흙물과 핏물로 얼룩져 변색된 흰옷, 닳아 빠진 가죽신, 방치되어 오금까지 늘어진 뻣뻣한 머리털, 온몸에 문신처럼 자리잡은 흉터와 채 아물지 않은 생채기, 흉하게 깨져 악취를 풍기는 손톱과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가락까지, 영락없는 몰골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뺨을 쓸어 줄 사람이 누구 하나 없기 때문에.
이름
야달 허스 / yadal hus
인적사항
여성/55세/215cm/88kg
성격
[과묵/염세/투박/건조]
무엇이 그리 불만스러운지 항상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젓는다. 서 있을 땐 막연히 허공을 응시하고, 앉아 있을 땐 고민에 잠겨 바닥을 툭툭 찬다.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지만 누군들 필요 이상 내치지 않는다. 다친 어깨를 보살피거나 무기를 손질할 땐 한결 말이 많아지는데, 그 외엔 보통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는 자주 입을 다문다.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낼 때, 종교에 대한 화제가 오갈 때, 전리품에 불을 붙일 때….
눈가가 말라붙은 지 오래지만 침울한 나날이 연중 절반이다. 곪아 터진 울분이 속에서 들끓어도 얼굴을 붉히진 않는다. 그건 악다구니를 토해낼 의지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삶의 풍파에 무뎌져서이기도 하고, 진즉에 세상 모든 것에 실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이제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다. 웃지 않은 지도 사랑하지 않은 지도 한참 되었다. 말하자면 가슴 속에 남은 불씨라곤 분노와 염증이 전부인 것 같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냐고 물어도 명료한 대답을 내어줄 순 없다. 다만 세상을 등진 늙은 사냥꾼은, 도수장의 차가운 탁상에 낙엽처럼 엎드린 채 가끔 생각한다. ‘그러게. 무엇일까. 무엇이 뼈칼처럼 나를 갉아낸 걸까.’ 하지만 고민은 잠깐이다. 그런 것은 이제 와 중요치 않다.
기타사항
1.
달아오른 볕에 등마루가 누렇게 물든 돼지가 허름한 축사를 이리저리 누비며 낮은 소리를 낸다. 축축한 울음 같기도 하고 미어지는 비명 같기도 한 가느다란 음성은 반나절이 지나 사그라든다. 허기에 지쳤기 때문이다. 야달은 창고에 재어 둔 먹이를 여물통에 부어 넣는다. 여물에 코를 박은 돼지가 허겁지겁 뱃속을 달래고 있으면 아버지가 고기 수레를 끌고 돌아온다.
“오셨어요?”
야달은 달갑게 웃으며 마중을 나선다. 딸에게 잠깐 눈길을 준 아버지는 대꾸 없이 비척비척 도축실을 향해 걷다가 문간에서 맥없이 쓰러진다. 창백한 안색이다. 불길한 낌새를 느낀 어머니는 서둘러 달려가 아버지의 뺨에 손등을 대어 본다. 불볕처럼 열이 끓고 마른 입술은 헛소리를 연신 뇌까린다.
희게 질린 어머니가 야달을 시켜 사제를 불러온다. 그는 유능한 의원이지만 오늘은 좀처럼 진단을 내리지 못한다. 사제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세 사람의 가슴은 죄인처럼 무거워지고, 이내 모두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다.
그렇게 엿새가 흐른다. 새벽부터 병구완하던 어머니는 지쳐 잠들었고, 홀로 남은 야달은 텅 빈 도수장을 배회하며 시간을 죽인다. 누추하나마 너른 축사를 공연히 맴돌다 보면 야달은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른다. 문득 찬바람이 팔뚝을 에워쌀 때면 어느새 달이 뜨는 밤이다.
야달은 웃옷을 단단히 여미고 걸음을 돌린다. 날이 이울었으니 이만 어머니의 곁에 누우러 갈 모양이다. 그는 감겨 오는 눈을 치켜뜨며 한동안 길을 따라 걷다가- 별안간 우두커니 멈춘다. 그리고 제자리에 죽은 듯이 서서 귀를 기울인다. ‘---...’ 광포한 야수의 울부짖음이 멀리서 울려퍼지고 있다. 집이 있는 방향이다.
야달은 집을 향해 들개처럼 달린다. 불길한 직감이 가슴을 부추긴 것이다. 한참 달리다 보면 군중이 보인다. 성난 사람들이 횃불을 든 채 마당을 에워싸고 있다. 그는 숯내를 맡으며 발길을 재촉한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어지러운 소란과 형형한 누런 빛이 점점 커지고 선명해진다. 이제 코앞이다. 숨을 헐떡이며 집앞에 다다른다. 어느새 건물은 반쯤 살라먹혀 탄내를 풍기고, 어머니는 군중에 포위된 채 발악하듯 괴성을 내지르고 있다. 축축한 울음 같기도 하고 미어지는 비명 같기도 한 가느다란 괴성이다. 야달은 얼빠진 채 광경을 바라보다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크게 묻는다. “그런데 아버지는요?” 그러자 군중이 일제히 야달을 돌아본다. 일렁이는 불길에 누렇게 물든 얼굴들. 그들은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 그건 괴물이었으니까.
정오처럼 환한 밤, 불길은 가장 아늑했던 곳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야수의 울부짖음은 들려오지 않는다.
2.
아버지의 별세를 기해 야달의 마을에도 풍토평이 들끓었다. 병자의 가족이 길목에 나타나면 행인들은 은근한 눈신호를 주고받으며 걸음을 돌리기 일쑤였다. 마을에는 터만 남은 집이 점차 늘었다. 거리에는 시꺼먼 재가 흩날렸고 연기처럼 경계심이 만연했다. 머지않아 병마가 대국적으로 활개를 펴자 마을에도 토벌자를 자처하는 청년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미처 불사르지 못한 병자가 파메스가 되어 주민들을 해치는 일이 왕왕 벌어지곤 했으니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짧은 시간이 지나자 토벌자들은 영웅으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반면 파메스의 시신은 장신구가 되고 투구가 되고 모피가 되어 전리품 시장에 나돌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해? 파메스도 한때….’ 야달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진절머리가 났다. 전리품, 토벌, 마을 사람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그가 돌연 마을에서 자취를 감춘 건 그 무렵이었다.
3.
야달의 실종으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이다. 늙은 여자가 욕지거리를 읊조리며 진흙탕에 구겨진 몸을 일으킨다. 그는 등골에 축축하게 들러붙은 붕대를 말리지 않고 뼈칼을 고쳐 쥔다. 사냥의 밤이 머지 않았다.
해질녘을 앞둔 거리는 스산하다. 굳게 친 커튼 사이로 드문드문 엿보이는 불안한 눈동자들이 그렇고, 어슬렁거리는 사람마다 굳게 움켜쥔 무기가 더욱 그렇다. 그러건 말건 여자는 정적이 내려앉은 대로를 보란 듯 배회한다. 파메스가 두렵지 않든지 사냥에 익숙한 것이다. 그가 대담하게 길목은 가로지르고 있으면 앳된 청년이 말을 걸어온다. 근사한 파메스 가죽을 걸친 금발의 사냥꾼이다. 용건은 명료하다. ‘동행하시겠어요? 연배가 꽤 되시는 것 같은데, 전리품은 나누어 드릴 테니까...’ 동정심인 것 같다. 여자는 청년의 문장이 끝나기 전에 말허리를 단칼같이 자른다. “내가 당신과? 전리품을?” 그리고 건조한 빈정거림이 이어진다.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자 진위가 모호한 소문이 시가지 변두리를 휘돌기 시작한다. 사냥꾼을 증오하는 사냥꾼 ‘야달’에 관한 이야기다. 소문에 따르면 야달은 피의 범람에서 어렵사리 목숨을 건사한 기성 사냥꾼인데, 전쟁으로 상한 팔을 이끌고 험지에 다녀온 전적만 대여섯 번이다. 그는 집착스레 전리품을 모아다가 고스란히 불사른다. 파메스의 제사라도 치러 주려는 듯이. 또 그는 사냥꾼이라는 족속을 백안시하는데, 그러면서도 사냥업에 몸담는 이유를 물으면 남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내놓는다. “나는 사냥꾼이 아냐. 파메스의 딸이다.”
어떤 사람들은 야달의 존재를 지어낸 괴담으로 치부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주장하므로 한동안 구시가지의 뒷길은 언쟁으로 분분했다. 그런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 건 근래의 일이다. 토벌대 모집 소식이 세간에 오르내리자 야달 허스는 그늘이 내려앉은 얼굴로 협회를 찾았다. 그는 검게 그을린 양가죽 자루를 탁상에 내려놓으며 직원에게 턱짓했다. “확인해 봐.” 직원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자루 끈을 풀었다. 파메스의 조각난 사체가 들어 있었는데 최근에 공수한 것으로 보였다. 면접 자격을 얻은 야달은 큰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쌀쌀하게 돌아섰다. 직원은 그를 붙잡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가 협회를 나서면 방문 차례를 기다리는 사냥꾼들이 정문부터 줄지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야달은 냉담한 눈길로 행렬을 흘겨보며 소리 없이 걷는다. 그러면 전리품을 오른팔에 낀 검은 머리 사냥꾼이 시비를 붙인다. “사냥이 싫으면 집구석에나 붙어 있지 왜 토벌에 끼어들려고 그래?” 야달은 늘 그랬듯이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내놓고 그를 멀리 스쳐간다. “그들은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게 나아.” 소문은 또다시 역병처럼 퍼지고, 뼈칼을 쥔 너절한 어깨는 발자국처럼 핏내를 남긴다.
4.
- 늙은 사냥꾼이자 실질적 경계 대상자. 사냥 중에는 돼지머리를 뒤집어쓴다.
- 그는 늘 많은 피를 흘리며 사냥을 마치고는 부상이 낫기도 전에 다시 뼈칼을 쥔다.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사냥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사냥에 대한 그의 검질긴 집착은 불가해한 귀소본능과 같다. 이에 대해 이유를 물으면 그는 건조하게 대답한다. “내게는 아버지에 대한 책임이 있다.”
- 84년 경, 도축업자였던 부친이 파메스가 되어 사망했다. 사건을 기해 요아스를 떠나 사냥꾼으로 전직하였으며, 모친은 연락 두절-실질적 사망 상태다.
- 피의 범람 당시 큰 부상을 입었다.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으나, 오른 어깨에 중한 후유증이 남아 왼팔을 주로 사용한다. 외팔로 무리한 탓에 남은 왼어깨도 성치만은 않다. 뼈칼을 휘두를 때마다 앙상하게 우그러진 관절이 욱신거려 오지만 그는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왼팔은 언젠가 전장에 떨어질 것이고, 그래도 그는 전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 아달랴 구시가지 거주자. 시가지 변두리에 위치한 업장에 묵으며 도축업을 겸하고 있다.
- 녹슨 칼날처럼 거친 음성. 부식된 정신을 닮았다.
역할군
도살자
- 크고 두꺼운 ‘뼈칼’로 급소를 단번에 내리친다. 시간을 오래 끌지 않는 방식은 최후의 배려다.
- 홀로 사냥에 나설 때 그의 원칙은 분명하다. “단시간에, 고통 없이, 깔끔한 안식을.” 그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남다르게 노력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고전하는 빈도가 차츰 잦아지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